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 사태 (문단 편집) == 자하문 초소 전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10802023.jpg|width=100%]]}}} || || {{{#fff '''자하문 초소 전투 당시 사망한 [[최규식]]의 동상'''}}} || 9시 50분, 124 부대원 31명은 청와대에서 불과 '''300m''' 남은 지점인 [[자하문]] 초소에서 이곳을 지키던 [[서울종로경찰서|종로경찰서]] 소속 [[정종수(경찰)|정종수]] [[순경]]과 박태안 순경에게 '''첫 검문'''을 받게 되었다. 부대원들은 "우리는 [[국군기무사령부|CIC]] (당시 육군 방첩부대)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고 다그쳤지만 형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 저 두 형사들도 직감적으로 공비라고 예상을 했지만 머릿수로도 밀리고 총도 없던 터라 쓸데없는 잡담을 해 가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당시 공비들이 시내버스 한 대를 세운 뒤 서울 시내로 진입하려던 참이었다.] 시간이 지체됐고 그 사이 무전으로 연락을 받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출동했다.[* 최규식은 청와대를 관할 구역에 두고 있는 종로경찰서장이었고 군 복무 시절 박정희의 부관으로 일한 측근으로 전역 후에도 중용되고 있었다.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에 이들이 자기들을 방첩부대 소속이라고 주장해도 물러서지 않고 수하를 한 것.] 이때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이를 군의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하여 벌인 일이라는데 사실은 민간인들이 타고 있던 [[보광교통|원효여객]] 소속 1813번 [[시내버스]]였다. 시간도 야간이라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도 않으니 패닉에 빠져 무작정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youtube(9p30JlG5NeE)]|| 31명 중 조장 김종웅이 최규식 총경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최규식 총경은 지근거리에서 총탄 여러 발을 맞아 현장에서 [[전사(죽음)|전사]]하였고 검문을 하며 시간을 끌던 [[정종수(경찰)|정종수]] [[순경]][* 1935년 7월 17일 경북 상주 출생. 전사할 당시에는 순경이었으며 전사 후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경사로 1계급 추서(당시에는 경장 계급이 없었다). 2017년 6월 5일엔 전사한 지 무려 50년 만에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고개 현충시설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다. 당시 함께 전사한 최규식 총경은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서되었고 1969년 청와대 인근에 동상이 건립되었지만 정종수 형사는 하위 직급이었던 탓에 그동안 순직비 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는 동료 형사와 함께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였으나 이후 후퇴하던 공비들의 총에 중상을 입었고 치료 도중 사망했다. 그 외에도 많은 경찰이 부상당했으며 [[민간인]] 5명이 사망했다. 시내버스의 승객과 기사를 포함해 인근에 있던 애꿎은 시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그중 1명은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 등 온갖 살상무기들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진 공비들이 저지른 만행에 희생됐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 쳐들어간 공비들이 총격으로 살해했던 것. 그런데 무장공비 중 김춘식 소위는 위의 형사들이 계속 말을 걸어 대는 통에 혼자 대열과 떨어져 있다가 총성이 울리는 순간 형사들에게 짱돌을 맞고 제압되어 곧바로 생포되었는데 치안국으로 압송되어 무장해제를 받던 도중 실수로 수류탄 핀이 뽑히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 폭사했다. 결국 사살로 치게 된다. 실수가 아니라 자폭이라는 설도 있으며 그나마 이때 직접 무장해제를 시키던 채원식 치안국장이 공비를 복도 쪽으로 밀어서 아군 측은 다행히도 부상자 없이 전원 생존했다. [[인왕산]]과 [[비봉산]], [[의정부]] 등지로 도주한 공비들은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대부분 죽었다. 최종적으로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다. 대한민국 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 북으로 도주에 성공한 박재경이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당시 군에선 '일개 병사도 아니고 연대장이 전사할 정도면 이건 명백한 작전 실패'라며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임무 수행 중 전사했는데 응분의 포상을 하지 않는다면 군의 사기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이익수에게도 훈장 및 계급 추서와 같은 예우를 해 주었다. 출처는 [[이재전]] 회고록.]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 과정에서 공비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 건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 예정이던 여성[* 당시 22세의 여성 윤정순 씨.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약혼자와 같이 차를 기다리던 중 총소리에 놀라 근처 가게로 뛰어들어가다 가슴과 배에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이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등학교]])의 [[수위]][* 무장간첩 중 5, 6명은 무리지어 경복중·고교장 자택을 뛰어넘고 달아났다. 경찰이 집중사격했으나 이들은 달아나면서 수류탄을 집 뒷마당에 던져 변소와 유리창 등을 파손했다.(집주인 가족들은 안방에 몰려 이불을 뒤집어쓴 채 긴장된 하루 밤을 새워야 했다.) 공비들은 학교 담으로 엄폐하며 계속 응사했고 그러던 중 수위 정사영씨가 놀라 뛰어나왔다가 이들이 던진 수류탄 폭발에 사망했다.]등 등 일반인, 심지어 참관 및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까지 사망할 정도였으니... 결과적으로 의도가 있었든 아니었든 무고한 민간인들도 희생당하기는 했다.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